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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 그러나 그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 순간이 올 때까지는 나는 성령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
내가 복 있는 이유는 나의 가난 때문입니다. 만일 내게 의지력도 없고 드러낼 만한 고상한 성향도 없을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는 그 가난을 통해 내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가난뱅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 의식이 자아의식의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곳마다 주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안식, 곧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는 안식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도록 온전하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당장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적 과민성은 무시한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치료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아의식’이 아닌 ‘예수님 의식’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우리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보다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생각’에 더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슬픔을 자아낼 주님의 거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쉽습니다.
우리도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어떤 특별한 지점에서 주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할 때 주께서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사귐의 역사가 있습니까? 제자도의 한 가지 증표는 주님과의 친밀한 연결, 곧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짓기를 멈춘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따라 순종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주님의 징계를 무시하거나 주님께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해버리면 됩니다. 우리가 얕은 차원의 성화의 경험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견책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아, 이건 마귀의 일임에 틀림없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음성은 미풍처럼 부드러워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 가운데 살지 않으면 결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가책은 가장 부드럽게 오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감지할 만큼 예민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령을 소멸할 것이고 영적 생활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성령의 가책은 언제나 잔잔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오는 작은 소리이기에, 오직 깨어 있는 성도들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화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역사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과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깊은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 진실하게 서면 주님께서는 주의 진리로 당신의 삶을 붙드셔서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엘리야에게 배운 것을 실천하십시오. 그가 남긴 겉옷과 기도를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굳게 결단하고 더 이상 엘리야를 찾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삶을 얼마나 쓸모 있었는가로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곳에 성도들을 두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곳이 어디든지 맞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유한한 몸이 주님께 완전히 굴복하는지, 주님께서 이 몸을 통해 매 순간마다 역사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매 순간마다 드러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계속적으로 의아한 마음으로 나의 상식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왜 여기서 내가 좌절해야 하지? 내가 아버지의 일로 마음이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상황과 상관없이 그 거룩하고 순결하신 영원한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서 당신 대신 살아가실 때 당신의 삶은 생동력 있는 단순한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하고 살아가셨던 모습이, 주께서 당신 안에서 살아가실 때 당신을 통해서도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 한 가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됨은 그 어떤 것보다 기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부르심은 주님의 목적을 위해 그분 자신과 동료가 되도록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동료로서의 자격 시험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주의 경륜 가운데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에 의해 모든 주변 상황이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손상되기 쉬운 것도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강권과 비교하면 바닥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눅 18:31). 주님이 우리를 항상 데리고 다니십니다. 우리가 도착한 것보다 아직 갈 길이 훨씬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신체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소모할수록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소모할수록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일 또는 다음 시간을 위해 힘을 주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 순간의 긴장을 위해 힘을 주실 뿐입니다. 유혹은 문제를 대할 때 상식으로 대하려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큰 기쁨이 넘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상황이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이란 가만히 손을 접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의 상태에서 우리는 보통 때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주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관계가 옳아야 할 뿐 아니라 그 관계의 외적 표현도 옳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모든 구체적인 것까지 다 훑어보실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의심하지도 않으셨고 결코 악감정으로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주의 은혜, 사람의 한계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완벽하셔서 주님은 누구에게도 절망을 느끼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듯한 우리 개인 생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구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나의 꿈입니까? 그분의 목적은 지금 내가 주님과 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동 속에서 평안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황금률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사람이 과학적인 지식을 원하면 지적 호기심이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오직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일들이 내게 힘들어 진다면 이는 분명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뭔가가 있어서 그러합니다. 지적 어둠은 무지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영적 어둠은 내 안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체험해보지 못했다면, 이는 겁 많은 소심함과 문명 생활의 보호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을 향한 진단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분은 개인의 삶의 중심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셨던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곧 성령만이 더러움이 전혀 없으신 완전한 청결이십니다.
산상수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굳이 우리가 거듭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엄중한 작업입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율례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수 있고, 그를 갓난아기같이 순결하고 단순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결은 만일 내가 주 안에서 재창조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구속을 통해 착수하신 일입니다.
[설교노트]
[교회소식]
도심에서 15분만 가면 자연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친구 이웃들을 초청합니다. 6월 15일 11시 부터 3시까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3시 이후 시설 이용 가능하여 개인적으로 수영및 카약을 즐길 수 있습니다)
2024년 새학기를 맞이하여 신입생, 가족, 친구, vip를 초청하여 야외예배를 갖습니다. 여러분을 기쁜 마음으로 초청하고 환영합니다.